식당 문을 열고 나오면 정오의 볕이 정수리를 찌른다. 비빔밥 한 그릇을 해치우고 돌아오는 길, 셔츠 깃 사이로 스미는 바람이 묘하게 낯설다. 매일 걷는 보도블록과 어제와 같은 간판들. 지루함은 익숙함의 다른 이름이다. 익숙하다는 것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궁금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죽은 풍경이라는 의미다.
안동시청 복도 어딘가에서 서류 뭉치를 안고 지나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일본인 공무원 오가타 씨. 그녀는 2008년부터 요미우리 신문에 안동을 알리는 글을 썼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의 손끝에서 안동의 묵은 맛과 멋이 일본어 문장으로 치환됐다. 낯선 땅에 정착한 이방인이 그곳의 전통을 제삼자에게 설명하는 일. 그것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대상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자신의 호흡에 맞춰 다시 뱉어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재해석의 과정이다.
하회마을 부용대 절벽 위에서 낙동강으로 줄불이 떨어진다. ‘선유줄불놀이’라 불리는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불의 향연을 두고 그녀는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우리에겐 그저 ‘지역 축제’나 ‘무형문화재’라는 딱딱한 명사로 박제된 풍경이, 그녀의 눈에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감각의 덩어리로 비친 모양이다. 통역사라는 직업은 경계 위에 서 있는 운명을 타고난다. 이쪽의 말을 저쪽의 마음으로, 저쪽의 정서를 이쪽의 논리로 부지런히 퍼 나른다.
그녀가 쓴 기사들을 상상해 본다. 안동 찜닭의 매콤한 향이나 하회탈의 기괴한 웃음 뒤에 숨은 풍자를 일본 독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밤을 단어와 싸웠을까. 내가 매일 무심코 지나치는 사무실 책상 모서리나 식당의 낡은 수저통도,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치열한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타자의 시선은 잔인할 만큼 정교하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며 흘려보낸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발견이 되기도 한다.
직장인이라는 명함 아래 묻혀 지내다 보면 감각은 금세 마모된다. 출근길 지하철의 소음과 퇴근길의 허기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안동’을 놓치고 사는가. 여기서 말하는 안동은 지명이 아니다. 내 주변을 구성하고 있지만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 고유한 가치들이다. 낡은 만년필의 필기감, 오래된 동료의 진심 어린 농담, 창가에 내려앉는 오후 세 시의 그림자 같은 것들.
오가타 씨는 통역과 가이드, 번역 업무를 도맡으며 안동의 ‘매개자’가 되었다. 매개(媒介)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둘 사이를 잇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잇는다는 것은 양쪽 모두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안동의 전통을 일본에 전하며 느꼈을 그 가슴 벅참은, 어쩌면 대상에 완전히 동화되면서도 끝내 이방인의 시선을 유지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귀한 선물이었을지 모른다.
오후 업무가 시작되기 전, 모니터 앞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블루라이트가 쏟아지는 이 삭막한 공간도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관찰의 기록이 될 수 있을 터다. 내가 선 이 자리가 지겹게만 느껴진다면,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눈이다. 타국에서 온 한 공무원이 발견한 안동의 불꽃처럼, 내 일상의 파편들도 누군가의 문장 안에서는 눈부시게 타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씁쓸한 맛이 혀끝에 감돈다. 이 쓴맛조차도 누군가에게는 ‘한국 직장인의 오후를 지탱하는 검은 액체’로 묘사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의 시선은 때로 구원이 된다. 내가 나를 지겨워할 때, 나를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내 삶의 한 조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우리가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진짜 이유다.
본 칼럼은 매일 12시, 오늘의 뉴스를 바탕으로 자동 생성됩니다. 출처: 하회 줄불놀이 통역 맡은 안동시 공무원 오가타씨 “가슴 벅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