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의 공기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낭만적이었을까. 실리콘밸리의 어느 식당, 혹은 누군가의 거실에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던 두 남자가 있었다. 일론 머스크와 샘 올트먼. 당시 그들이 내건 기치는 숭고했다. 구글 같은 거대 기업이 AI를 독점하게 두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비영리’로 인류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것. 오픈AI라는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2026년 오늘, 그 이름을 둘러싼 풍경은 황폐하다. 법정 서류가 오가고, 과거의 이메일이 폭로되며, 서로를 향한 냉소만이 가득하다.
최근 미 IT 전문 매체 더 버지는 흥미로운 관점을 내놨다. 머스크가 자신을 단순한 기업가가 아닌 ‘인류를 구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분석이다. 그에게 AI는 통제해야 할 괴물이었고, 그 고삐를 쥘 적임자는 자신뿐이어야 했다. 반면 뉴요커가 공개한 오픈AI 내부 이메일은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샘 올트먼은 처음부터 오픈AI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강력하게 원했다. 그는 조용하지만 치밀하게 자신의 왕국을 설계하고 있었다. 한 명은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선지자적 망상에, 다른 한 명은 그 구원을 실행할 권력의 정점에 집착한 셈이다.
2018년, 머스크가 오픈AI를 떠난 사건은 흔히 말하는 ‘성격 차이’로 치부하기엔 그 골이 너무 깊었다. 머스크는 테슬라에 AI 연구를 통합하려 했고, 올트먼과 이사진은 이를 거절했다.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면 파괴자가 되겠다는 심산이었을까. 머스크가 떠난 뒤 오픈AI는 영리 법인으로 전환하며 마이크로소프트의 거대 자본을 수혈받았다. 비영리라는 초심은 낡은 앨범 속 사진처럼 빛이 바랬다. 머스크는 이를 두고 “비영리 단체로 시작했는데 왜 300억 달러 가치의 영리 기업이 되었느냐”며 소송을 걸었다. 겉으로는 대의를 내세우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소외된 채 질주하는 괴물에 대한 질투가 섞여 있다.
점심시간, 식당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속 두 사람의 얼굴을 본다. 그들은 코드로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지만, 정작 세상을 움직이는 건 아주 오래된 인간의 욕망이다. 누가 더 높은 곳에 앉을 것인가, 누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기록될 것인가. 기술의 발전 속도는 눈부시게 빠르지만, 그 기술을 굴리는 인간의 정치 역학은 수천 년 전 왕좌의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올트먼이 이사회에서 쫓겨났다가 며칠 만에 화려하게 복귀하던 그 드라마틱한 장면은, 이 판이 이미 기술의 영역을 넘어섰음을 증명한다.
직장 생활을 하며 마주하는 수많은 협업과 배신, 그리고 명분 뒤에 숨은 실리 싸움이 이 거물들의 관계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혁신가들이 오직 미래만을 보고 달릴 거라 믿지만, 그들도 결국 ‘나’라는 자아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밀어내고 손을 잡는다. 머스크는 X(옛 트위터)를 통해 끊임없이 올트먼을 저격하고, 올트먼은 부드러운 미소 뒤에서 칩 제국을 건설한다. 인류를 구하겠다는 약속은 이제 마케팅 용어에 가까워 보인다.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남은 커피를 마신다. 2026년의 AI는 정말로 인류를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두 남자의 자존심 싸움을 위한 가장 비싼 장난감이 되어가고 있는가. 확실한 건 하나다. 기술은 중립적일지 몰라도, 그 기술을 쥔 손에는 반드시 지문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시대를 재편하는 건 거대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그 알고리즘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지독한 열망이다.
머스크와 올트먼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한때 서로를 ‘가장 똑똑한 동료’라 치켜세우던 이메일은 이제 법정의 증거물로 전락했다. 기술이 인간을 닮아간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인간이 기술보다 더 복잡하고 고치기 힘든 버그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구원은 멀고, 싸움은 가깝다.
본 칼럼은 매일 12시, 오늘의 뉴스를 바탕으로 자동 생성됩니다. 출처: ‘AI 브로맨스’ 머스크와 올트먼의 사랑과 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