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항공 센터의 공기는 늘 건조하다. 5월 21일, 노사 임금협상 잠정 합의안에 도장이 찍힌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은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행선지는 대만. 휴가나 휴식과는 거리가 먼, 아주 구체적인 목적지가 있는 비행이었다.
대만 신주 과학단지에 위치한 미디어텍(MediaTek) 본사. 그곳에서 이 회장은 릭 차이(Rick Tsai) CEO를 만났다. 비공개 회동이었지만, 시장이 읽어내는 맥락은 자명하다. 삼성전자가 TSMC의 앞마당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대안’을 자처하고 나선 셈이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1등이 점유율을 독식하는 동안, 2등은 문전박대당하지 않기 위해 더 낮은 자세로 명함을 내밀어야 한다.
미디어텍은 세계 최대 팹리스 중 하나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AP 시장에서 퀄컴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들의 주 거래처는 당연히 TSMC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간다. 인공지능(AI) 열풍으로 TSMC의 생산 라인은 이미 포화 상태다. 부르는 게 값이다. 가격 인상 통보를 받아든 팹리스 기업들에게 TSMC는 이제 든든한 파트너인 동시에, 언제든 수익성을 갉아먹을 수 있는 거대한 벽이 됐다.
여기서 삼성전자의 전략적 틈새가 발생한다. 업계 용어로 ‘세컨드 소스(Second Source)’. 특정 업체에 공급을 100% 의존할 때 발생하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두 번째 선택지. 삼성은 지금 미디어텍에게 가장 매력적인 세컨드 소스가 되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현장에 동행한 고위 임원진들의 면면을 보면 단순한 친목 도모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회동에서는 3나노, 혹은 그 이하의 미세 공정 수주에 대한 구체적인 타진이 오갔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의 강점을 무기로 내세운다. 고대역폭메모리(HBM)와 D램을 파운드리 서비스와 묶어 제공하는 ‘원스톱 패키지’다. 설계부터 생산, 메모리 수급까지 한 번에 해결해 주겠다는 제안은 시간에 쫓기는 팹리스들에겐 꽤 달콤한 유혹이다.
현실은 차갑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수율 논란과 공정 지연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내지 못했다. 수주전은 신뢰의 싸움이다. 이 회장이 직접 대만을 찾은 것은 기술적 수치보다 더 강력한 ‘확신’을 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우리가 책임지고 물량을 뽑아내겠다”는 약속을 회장이 직접 가서 하는 것과 실무진이 이메일로 보내는 것은 무게감이 다르다.
모바일 AP 분야의 협력 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갤럭시 보급형 모델과 태블릿에는 미디어텍의 ‘디멘시티’ 칩셋이 대거 탑재되고 있다. 삼성이 미디어텍의 칩을 사주고, 미디어텍은 삼성의 공장에 물량을 맡기는 주고받기식 거래.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보다 확실한 유대 관계는 없다. 서로의 지갑이 얽혀야 파트너십은 공고해진다.
직장인들이 점심 메뉴를 고를 때 1순위 맛집이 붐비면 차선책을 찾듯, 글로벌 반도체 시장도 비슷한 논리로 움직인다. 다만 그 차선책이 되기 위해 수조 원의 설비 투자와 회장의 비공개 출장이 동반될 뿐이다. TSMC 중심의 견고한 생태계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자존심보다 실리가 우선이다.
귀국길 공항 사진 속 이 회장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피로해 보였다. 노사 갈등이라는 내부의 불을 끄자마자 외부의 전쟁터로 뛰어든 경영자의 운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를 ‘광폭 행보’라 칭송하고, 누군가는 ‘위기감의 발로’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앉아서 기다려서는 아무도 삼성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 위에서 생각한다. 1등이 아닌 자가 살아남는 법은 1등보다 더 많이 걷고, 더 자주 고개를 숙이며, 더 확실한 대안이 되는 것뿐이다. 삼성전자가 대만에서 가져온 보따리에 무엇이 들었을지는 조만간 분기 실적 발표나 수주 공시가 말해줄 것이다. 시장은 말이 아니라 숫자로만 대답하니까.
본 칼럼은 매일 12시, 오늘의 뉴스를 바탕으로 자동 생성됩니다. 출처: 이재용, 노사합의 직후 대만행…미디어텍 만나 파운드리 수주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