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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의 파도와 불닭볶음면

중동의 젊은 세대에게 ’힙한 문화’로 자리 잡은 K푸드와 지정학적 긴장 완화가 가져온 식탁의 변화를 다룹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메뉴판을 멍하니 내리쓸어 본다. 오전 내내 시달린 메일함의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선택지는 기껏해야 제육볶음과 김치찌개 사이다.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비슷한 메뉴로 채우는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대단히 엄숙하면서도 퍽 지루하다. 뜨거운 뚝배기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양념 냄새를 맡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구 반대편, 모래바람이 부는 중동의 한 식탁에서도 누군가 이 매콤한 붉은색에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최근 흘러나온 미국과 이란의 종전 합의 관련 소식은 언뜻 먼 나라의 정치적 역학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물류망이라는 실핏줄을 타고 내 지갑과 식탁에 아주 정직하게 닿아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열리고 전쟁으로 치솟았던 포장재 원료인 나프타 수급이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뉴스에 가장 먼저 숨통이 트인 것은 국내 식품업계다. 꽁꽁 묶여있던 물류의 동선이 풀리며 중동으로 향하는 배들이 다시 시동을 걸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한국의 맛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예전의 중동 시장은 까다로운 ‘할랄’ 인증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성분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검증하는 절차가 우선이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UAE)의 젊은 세대에게 K푸드는 단순한 종교적 허용식(Halal)을 넘어섰다. 그들에게 이것은 일종의 ‘힙한 문화적 전유’다.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속에서 검붉은 불닭소스를 뿌려 먹으며 매운맛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인증하는 유행은 이제 낯설지 않다. 매운맛을 견뎌내는 동영상을 올리며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는 이 이국적인 풍경은,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전통적인 할랄 푸드가 ‘안전하고 깨끗한 음식’이라는 소극적 방어선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K푸드는 ‘도전하고 즐기는 문화적 콘텐츠’라는 적극적인 공격선에 서 있다. 엄격한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란 세대가 모바일 화면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자극적이고 트렌디한 식문화를 수입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발맞춰 기업들의 손길도 분주하다. CJ제일제당은 UAE와 사우디를 거점으로 할랄 인증을 받은 ‘비비고 김스낵’과 볶음면의 유통망을 널리 피고 있다. 전쟁으로 수출길이 막혀 지난 1월 계약된 물량을 묶어두어야 했던 동원F&B도 이달부터 참치와 양반김, 김치 등을 중동으로 본격 실어 나른다. 동원F&B가 보유한 20여 종의 할랄 인증 제품에는 전통적인 참치캔뿐 아니라 김부각과 떡볶이 같은 품목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한때 전쟁 여파로 포장재 수급률이 평시 대비 70% 수준으로 떨어져 공장 가동을 걱정하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이제는 공급망이 90% 가깝게 복구되며 기지개를 켜는 모양새다. 비록 현장에서는 물류비 감소나 단가 안정 효과가 실제 장부에 반영되기까지 몇 달간의 시차가 필요하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지만, 시장이 열리고 있다는 흐름 자체를 부인하긴 어렵다. 농심은 신라면 로제 같은 변주된 매운맛으로 젊은 층을 공략하고, 삼양식품은 불닭 브랜드의 라인업을 확장하며 중동의 식탁을 더 붉고 다양하게 물들일 준비를 마쳤다.

철저하게 검증된 안전함(할랄)이라는 기반 위에, 한국 특유의 강렬한 감각(K콘텐츠)이 얹어지며 독특한 시너지가 났다. 갈등이 가득했던 지정학적 위기가 조금씩 걷히는 길목에서, 기업들은 영리하게 새로운 문화적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매운 떡볶이와 짭조름한 김부각이 중동 사막의 편의점 매대에 자연스럽게 놓이는 풍경은 묘한 해방감을 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의 쌉쌀함이 입안에 남는다. 머나먼 호르무즈 해협의 파도가 잠잠해지는 것이, 리야드의 한 청년이 손에 쥔 불닭볶음면 면발로 이어지는 세상이다. 매일 마주하는 지루한 제육볶음 접시 뒤편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세계의 톱니바퀴가 보인다. 오후 업무를 시작하라는 메신저 알림이 울린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모니터 앞으로 향한다. 거창한 문명론 대신, 오늘은 그저 퇴근길 마트에 들러 새로운 라면이나 한 봉지 사 가야겠다는 가벼운 다짐을 해본다.


본 칼럼은 매일 12시, 오늘의 뉴스를 바탕으로 자동 생성됩니다. 출처: 미·이란 종전 기대에 식품업계 ‘숨통’… 중동 수출 재시동

김현빈 Developer &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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