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 보도블록 틈새에 비스듬히 처박힌 전동 킥보드 한 대를 본다. 노란색 몸체는 햇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누군가 급하게 떠난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채 길 한복판을 점유하고 있다. 셔츠 깃 사이로 땀이 배어나는 5월의 한낮, 이 기계 덩어리를 피해 좁은 보폭을 옮기는 일은 이제 서울 직장인들에게 일종의 장애물 경기가 되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모터 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는 경험은 불쾌하다. 소음도 없이 다가와 발꿈치를 스치듯 지나가는 속도감은 보행자의 권리라기보다 생존 본능을 먼저 자극한다. 길은 공유되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의 편리함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긴장을 담보로 한다. 킥보드가 ‘라스트 마일’의 혁명으로 불리며 등장했을 때, 그 혁명이 보도블록 위 보행자의 평화를 이토록 빠르게 잠식할 줄은 몰랐다.
서울시가 최근 내놓은 답은 단호하다. ‘킥보드 없는 거리’. 보행자가 밀집한 특정 구역에서 킥보드 통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시도는 올해 서울시 적극행정 최우수상에 선정됐다. 지난 3월부터 운영된 적극행정 포상제도, 이른바 ‘적또마’(적극행정 또 마음먹기)의 일환이다. 문혁 서울시 감사위원장은 포상제도를 통해 시민을 위해 일하는 공직사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행정의 속도가 일상의 불편을 뒤쫓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시정이 적극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규제의 칼날이 서슬 퍼럴수록 그 이면의 풍경도 함께 변한다. 킥보드가 사라진 거리는 쾌적할 것이다. 적어도 등 뒤를 자꾸 돌아봐야 하는 피로감은 줄어들 테니까. 반면 지하철역에서 목적지까지 남은 800미터를 15분간 걸어야 하는 이들에게 킥보드는 단순한 유희가 아닌 필수적인 이동 수단이었다. 효율과 안전이라는 두 가치가 인도 위에서 정면으로 충돌한다.
행정이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그만큼 심각한 갈등의 불씨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올해 3월 이후 11개의 적극행정 사례가 발굴됐고, 그 정점에 킥보드 규제가 서 있다. 규제가 강화될수록 공유 킥보드 업체들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고, 이용자들은 다시금 버스나 도보라는 익숙한 불편함으로 회귀할 것이다. 이것은 진보일까, 아니면 혼란에 대한 일시적인 퇴각일까.
도시의 공간은 제로섬 게임의 장이다. 킥보드가 차지했던 자리를 다시 보행자에게 돌려주는 행위는 정의로워 보이지만, 이동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누군가의 발을 묶는 행위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가 제 기능을 상실해가는 현상을 방치할 수는 없었을 터다. 킥보드 없는 거리가 지정된 구역에서 우리는 비로소 앞사람의 뒤통수가 아닌, 길가에 핀 꽃이나 상점의 쇼윈도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을 보며 걷다가 킥보드와 부딪칠 뻔한 아찔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정책을 환영할 수밖에 없다. 편리함은 한 번 맛보면 당연한 권리가 되지만, 안전은 상실한 뒤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서울시의 이번 결정이 행정적 성과를 넘어, 실제 도시의 리듬을 어떻게 바꿔놓을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사무실 건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방금 본 킥보드를 떠올린다. 내일이면 그 킥보드가 서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골목으로 밀려나 누군가의 발목을 위협하고 있을까. 길 위의 평화는 규제 한 줄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보도블록 위에서만큼은 기계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당연한 상식이 최우수상을 받아야만 하는 현실이 묘하게 씁쓸할 뿐이다.
모니터 앞에 앉아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오후 업무를 시작한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강남대로의 인도는 여전히 복잡하다. 저 수많은 인파 속에서 킥보드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조금 더 느긋하게 서로를 스쳐 지나갈 수 있을까. 행정이 약속한 쾌적함이 단지 서류상의 성과가 아니라, 퇴근길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증명되길 바랄 뿐이다.
본 칼럼은 매일 12시, 오늘의 뉴스를 바탕으로 자동 생성됩니다. 출처: 서울시 적극행정 최우수상에 ‘킥보드 없는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