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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지에서 정착지로, 시선의 속도를 늦추는 법

버스터미널의 변신이 보여주는 공간의 재발견. 스쳐 가던 경유지를 나만의 작은 안식처로 만드는 삶의 태도에 관하여.

매연 냄새가 밴 낡은 플라스틱 의자, 삐걱거리는 알루미늄 섀시 창문, 대합실 천장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던 브라운관 TV. 버스터미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복원되는 감각들입니다. 터미널은 늘 대기 상태의 공간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거나 스스로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 발바닥을 바닥에 완전히 붙이지 못한 채 주위를 서성이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머무름은 목적이 아니라 지체(遲滯)에 가까웠습니다.

가장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승리인 것처럼, 사람들은 행선지가 적힌 이정표를 쏘아보며 주머니 속 차표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경유지는 언제나 차갑고 건조했습니다.

경북 청도군에 있던 옛 공용 버스터미널이 내일, 5월 29일 ‘청도상상마루’라는 이름으로 문을 엽니다. 버스가 빠져나간 자리에 소통협력공간이 들어섰습니다. 먼지를 날리며 회차하던 대형 차량 대신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지역의 일을 고민하며, 머무는 공간으로의 전환입니다. 단순한 편의시설을 넘어선 지역사회혁신의 거점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식어가 아닙니다. 용도를 다해 버려지거나 방치되던 스침의 공간이, 이제는 등받이를 깊숙이 기대고 앉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곳으로 질적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속도를 줄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게 만드는 공간의 탄생입니다.

오전 8시의 지하철 환승 통로를 걷다 보면 가끔 숨이 턱 막힙니다.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의 보폭에 맞춰 내 다리도 기계적으로 움직입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발짝만 늦게 떼어도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꽂힙니다. 직장인의 하루는 정거장의 연속입니다. 집이라는 출발지에서 회사라는 목적지까지, 수많은 환승역과 정류장을 스쳐 지나갑니다.

이 동선에서 모든 공간은 철저하게 기능적으로 소비됩니다. 환승 통로는 짧을수록 좋고, 버스 배차 간격은 좁을수록 훌륭합니다. 길 위에 서 있는 시간은 아깝고 버려지는 시간으로 취급됩니다. 쓸모없는 시간, 효율을 위해 지워버려야 할 여백. 목적지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을 풉니다.

도착한 목적지에서 온전한 편안함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모니터 빛 아래에서 시들어가는 뻐근한 뒷목을 만지며, 다시 퇴근길이라는 또 다른 경유지를 준비할 뿐입니다.

터미널의 변신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고쳐 쓰는 인테리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머무름에 대한 가치관의 복원입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플랫폼에 벤치를 놓고 책을 꽂아두는 행위는,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무언의 허락을 건넵니다.

출퇴근길에 늘 지나치던 모퉁이 카페, 지하철역 구석의 작은 꽃집, 아파트 단지 입구의 낡은 정자. 의식하지 않으면 그저 풍경의 일부로 흘러가 버릴 공간들입니다. 가끔은 의도적으로 그 흐름을 끊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15분 만에 삼킨 김밥의 묵직함이 가시지 않은 점심시간,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을 조금 에둘러 가보는 것. 늘 내리던 정거장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동네 골목을 타박타박 걸어보는 것.

공간이 변하면 그곳을 채우는 공기가 변하고, 종국에는 그 안을 걷는 사람의 호흡이 변합니다. 스쳐 지나가던 터미널이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는 것처럼, 차가운 콘크리트로 가득 찬 도심 한복판에서도 나만의 작은 터미널들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창한 아지트가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시선을 붙들어 매고 생각을 멈출 수 있는 모퉁이 하나면 충분합니다.

오늘 퇴근길,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다 늘 지나치던 상가 모퉁이에 잠깐 멈춰 섰습니다. 고소한 델리만쥬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불어왔습니다. 평소라면 냄새를 맡기도 전에 스마트폰 화면으로 시선을 떨구고 걸음을 재촉했을 길입니다.

발걸음을 늦추니 비로소 주변의 소음이 입체적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가벼운 웃음소리, 역무원의 나직한 안내 방송, 빗방울이 가볍게 바닥을 때리는 소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가끔은 이렇게 길 잃은 사람처럼 서 있는 시간이 가장 밀도 높은 순간이 될 수 있음을, 낡은 버스터미널의 변신이 조용히 말해주는 듯합니다.


본 칼럼은 매일 12시, 오늘의 뉴스를 바탕으로 자동 생성됩니다. 출처: “지나던 곳에서 머무는 곳으로”…청도상상마루 29일 개관

김현빈 Developer &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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