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45분. 사내 인트라넷의 ‘AI 기반 스마트 연차 신청’ 버튼을 누르다 마우스 휠을 거칠게 굴렸다. 분명 인공지능이 업무 효율을 극대화해 준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시스템이다. 정작 반차 한 번 쓰려면 비밀번호 오류를 세 번 거치고, 쓸데없는 팝업창을 대여섯 개는 꺼야 한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챗봇 캐릭터가 기괴하게 웃으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묻고 있다. 돕긴 뭘 돕나. 그냥 예전처럼 엑셀 파일 한 줄 쓰는 게 빠르다.
정보기술(IT)과 과학은 늘 이런 식이다. 멀리서 보면 인류의 구원인데, 가까이서 보면 당장 손가락 마디를 굳게 만드는 짜증의 연속이다.
점심시간 식당으로 가며 스마트폰을 켰다. 뉴스 창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소식이 떠 있다. 오늘 자 기사다. 핵심은 간단하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디지털 전환 같은 거창한 과학기술 분야의 정책 의제를 국민이 직접 제안하게 하겠다는 것. 이경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현장의 문제의식을 정책 논의로 직접 연결하겠다고 설명한다. 제안된 아이디어는 검토를 거쳐 무려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된다고 한다.
대통령 보고라는 단어에서 오는 무게감에 숨이 턱 막힐 필요는 없다. 오히려 주목할 부분은 ‘현장의 문제의식’이라는 단어다.
지금껏 과학기술 정책은 보통 직장인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대덕연구단지의 흰 가운을 입은 박사들이나 세종시 관가에서 밤새워 기획안을 두드리는 공무원들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예산 수십 조 원이 어디에 배정되고, 우주선 발사체가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대화 주제로는 흥미롭지만 퇴근 시간이나 월급 통장과는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였다. 정부 부처의 보도자료에 등장하는 ‘초격차 기술 확보’라거나 ‘글로벌 스탠다드 확립’ 같은 단어들은 늘 허공을 떠돌았다. 그 찬란한 단어들이 매일 아침 출근 버스 안에서 뚝뚝 끊기는 지하철 와이파이나, 은행 앱 하나 깔 때마다 강제로 설치해야 하는 정체불명의 보안 프로그램들이 주는 짜증을 해결해주지는 못했으니까.
기술이 일상의 뼈대 속으로 너무 깊숙이 침투해 버렸다. 과학기술은 국가 안보나 거시 경제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떠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회사에서 업무 툴을 다루고, 퇴근길 배달 앱으로 저녁을 주문하는 모든 순간이 디지털 기술의 지배 하에 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삐걱거림, 비효율, 불합리함은 학자들이 연구실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오직 매일 아침 지옥철을 타고 모니터 앞에 앉는 이들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진짜 과학기술 정책은 거창한 연구소 구석이 아니라 현장에 있어야 한다. 택배 기사의 PDA 단말기 성능 개선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고, 배달 플랫폼 라이더의 안전을 담보하는 실시간 내비게이션 데이터 개방 의무화일 수도 있다. 매일 쏟아지는 스팸 메일을 걸러내기 위한 이메일 프로토콜 개선처럼 아주 사소하지만 손끝에 와닿는 규제 완화나 법안이 필요하다. 이번 정책 제안 창구의 개설이 눈에 밟히는 건 이 때문이다. 탑다운(Top-down) 방식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사각지대를, 매일 생업의 현장에서 구르는 이들의 눈높이로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정부가 수백억을 들여 구축했다는 공공 데이터 포털이 왜 정작 민간 개발자들에게는 쓸모없는 가비지 데이터만 뱉어내는지. 회사에서 도입한 생성형 AI가 보안 규정에 묶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보가 되어버린 상황을 타개할 법적 가이드라인은 없는지. 고령의 부모님이 키오스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릴 때, 디지털 소외를 막기 위해 기기 UI 표준화를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는지.
사소하고도 뼈아픈 질문들이 다 정책의 씨앗이다. 거대 담론을 굴리는 전문가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매일 밤 야근하며 엑셀 파일과 씨름하는 대리들과 과장들만이 품을 수 있는 구체적인 분노다.
식당 문을 열자 청국장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동료가 물컵을 채우며 “오전 회의 때 부장이 또 AI로 보고서 쓰라고 난리더라”며 한숨을 쉰다. “그놈의 AI, 쓰면 쓸수록 손만 더 가는데 말이죠.”
스마트폰 화면을 엎어 놓으며 생각한다. 이 밥상머리의 한탄들이 청와대 보고서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떨까.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대단한 기술은 결국 매일 겪는 이 자잘한 귀찮음과 부조리를 깎아내는 데 쓰여야 마땅하다. 연차 신청 시스템의 기괴한 챗봇을 만든 이들에게, 그리고 그걸 허가한 이들에게 날카로운 피드백 한 줄 던질 기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제안서 한 줄 적는 데 드는 시간은 5분. 마침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20분이 남았다.
본 칼럼은 매일 12시, 오늘의 뉴스를 바탕으로 자동 생성됩니다. 출처: 과학기술 정책 의제, 국민이 직접 제안… 검토 거쳐 대통령 보고